꺼지지 않은 무대위의 불씨, 보헤미안 랩소디, 그리고 Queen

전설은 아직도 진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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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적관객 수 200만 명을 넘어 선 1970~1980년대를 중심으로 세계적 명성을 누린 영국 밴드 퀸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n차 관람, 즉 여러 차례 반복 관람하는 현상이 벌어지면서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있는 ‘싱어롱’ 상영도 인기를 누린다. 영화에서 그려지는 퀸의 모습은 꽤나 극적으로 그리고 아주 순탄하게 최고의 밴드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으로 비춰지지만, 과연 실제 퀸의 행보가 그렇게 순조로웠을까?

1968년,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메이와 베이시스트 팀 스타펠이 밴드를 만들기로 결정한다. 그들은 학교에 드러머를 찾는 광고를 게시판에 실었고 그를 본 치과대학 학생인 드러머 로저 테일러가 밴드에 들어오게 된다. 그들은 밴드 이름을 ‘Smile’이라고 지었고 지미 헨드릭스, 핑크 플로이드와 같은 밴드들의 콘서트를 보조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그러던 중 머큐리 레코드(Mercury Records)와 계약을 하고 ‘Earth’와 ‘Step On Me’ 두 곡의 싱글 앨범을 발매하기로 결정하는데, 머큐리 레코드는 미국에 본사를 두고 있어서 영국 쪽 앨범 유통에 매우 허술했다. 결국 싱글은 미국에서만 발매되었고 이마저도 판매량이 시원치 않았다. 스마일에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팀 스타펠이 스마일을 탈퇴한다.

이 전부터 스마일의 열성팬이자 당시 여러 밴드를 전전하던 파로크 불사라(Farrokh Bulsara), 지금의 프레디 머큐리를 새 멤버로 영입하고 밴드의 이름을 바꾸게 된다. 밴드의 이름은 Queen. 1971년, 2년 동안 비어있던 베이스 자리에 존 디콘(John Deacon)이 들어오면서 퀸의 라인업이 완성되고 전설이 시작된다. 1973년 발매된 1집 ‘Queen’은 상업적으로는 성공적이지 않았으나 평론가들로부터는 괜찮은 평가를 받았고 빌보드 차트 83위를 기록한다. 이후 ‘Mott the Hoople’이라는 밴드 투어의 ’오프닝 밴드‘를 맡게 되면서 팬클럽이 생기거나 앨범 판매량이 오르는 등 주목을 받게 된다.

1974년, 2집 앨범 Queen ll의 곡 ‘Seven Seas of Rhye‘가 히트를 치며 앨범 차트에서도 작은 성과를 내고 상업적으로 괜찮았다. 하지만 음악적으로는 “글램락의 찌꺼기다.”, “여기서 퀸이 더 발전한다면 내 모자를 먹겠다.”는 혹평을 듣기도 했다. 동년 하반기 싱글 ‘Killer Queen’이 발매되어 영국차트 2위를 기록하고 이어서 발매한 3집 ‘Sheer Heart Attack’까지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며 퀸은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3집 투어가 끝난 후 퀸은 기존 소속사였던 ‘트라이던트’를 떠나는데, 퀸의 음악의 모든 판권을소속사가 가지고 있었고 퀸의 정해진 보수는 20파운드, 원화로 대략 4만원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퀸은 엘튼 존(Elton John)의 매니저였던 존 리드(John Reid)와 만나 EMI와 직속 계약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 1975년, 퀸은 4집 A Night at the Opera를 발매했고 앨범의 리드싱글로 6분에 달하는 곡 ‘Bohemian Rhapsody’가 영국 1위, 미국 빌보드 차트 9위를 기록하며 세계적인 밴드로 도약하게 된다.

1976년 5집 A Day at the Races를 발매하는데, 프레디 머큐리 작곡의 ‘Somebody to Love’와 브라이언 메이 작곡의 ’Tie Your Mother Down’이 히트하며 전작의 성공이 단순히 행운이 아니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1977년 6집 ‘News of the World’를 발매하고 ‘We Will Rock You’와 ’We Are The Champions’를 히트시키며 음악계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굳혔고, 이때 존 리드와 합의하에 계약을 파기하고 그들만의 기획사를 만든다.

1978년 7집 앨범 ‘Jazz’는 이전 앨범들에 비해 직선적이고 대중적인 곡들로 채워져 있었는데, 이에 대한 평론가들의 반응은 여전히 냉정했다. 하지만 영국을 포함한 유럽, 남미, 일본 등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으며 특히 프레디 작곡의 ‘Don’t Stop Me Now’가 큰 인기를 끌었다.

1980년 8번째 정규 앨범 ‘The Game’을 발매하는데, 처음으로 신디사이저를 도입하고 팝-펑크적인 사운드로 변화를 줬다. 그 결과 앨범이 빌보드 차트 1위를 달성하고 최초로 남미에서 투어를 한 메이저 밴드가 되는 등 인기의 정점을 맞이한다. 싱글 ‘Another One Bites the Dust’와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도 빌보드 1위를 기록했고 이때 프레디 머큐리의 가창력과 무대 매너는 절정에 오른다.

1982년 10번째 정규 앨범으로 디스코풍이 매우 강한 앨범 ‘Hot Space’를 발매하는데, 음악 스타일의 급작스러운 변화와 퀸 특유의 사운드의 부재는 팬들을 외면하게 만들었고 결국 퀸 음악의 흑역사로 남는다. 하지만 이 앨범에는 퀸의 팬이라면 다들 사랑하는 노래인 ‘Under Pressure’가 수록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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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간 활동을 쉰 퀸은 1984년, 11번째 정규앨범 ‘The Works’가 영국 차트 2위에 올랐고 싱글 ‘Radio Ga Ga’는 히트했지만 유럽이나 남미 등을 제외한 곳의 인기를 예전 같지 않았다. 또한 이 시기 멤버들의 솔로 활동이 잦아 밴드 해체설이 돌았다. 85년, 아프리카 난민을 위한 모금 운동의 일환인 ‘라이브 에이드’ 콘서트에서 프레디 머큐리는 할당된 20여 분간 무대를 휘어잡으며 엄청난 퍼포먼스를 보여줬고 퀸은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퀸의 라이브에이드 공연은 2014년 영국의회가 선정한 ‘지난 80년간 세상을 형성한 가장 중요한 사건 80가지’중 대중음악 분야에서는 ‘마이클 잭슨의 등장’과 함께 뽑혔다.

이 공연에서의 인기는 86년 12번째 앨범 ‘A Kind of Magic’의 발매와 함께 전 유럽에 걸쳐 열린 매직 투어로 이어졌다. 7월 11일, 12일 웸블리 공연 2회를 포함해 전 공연이 매진을 기록했고 20만 명의 관객이 모인 영국 넵워스 공원에서 끝을 맺는다. 이 넵워스 공원에서의 공연이 퀸의 마지막 공연이 되어버렸는데, 그 즈음 프레디가 에이즈에 걸려 건강이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이 후 일체의 라이브 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이 마지막 공연은 비디오로 촬영하려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필름을 넣지 않은 채 촬영을 해 결국 본 공연에 대한 영상은 남아있지 않다.

3년 뒤인 1989년 13번째 앨범 ‘The Miracle’을 발매한다. 이 시기 프레디가 에이즈에 걸렸다는 소문으로 곤혹을 치르고 있었지만 앨범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그들의 80년대 앨범 중 음악성으로 가장 높은 평가를 받게 된다. 프레디는 자신이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음악 활동에만 전념하게 되었고 이렇게 만들어진 14번째 앨범 ‘Innuendo’에는 ‘Innuendo’와 ‘The Show Must Go On’등의 명곡들이 수록되어있고 퀸의 전체 앨범에서도 손꼽히는 명반으로 뽑힌다. 앨범의 성적은 좋았지만 프레디의 건강 문제로 투어는 불가능했고 흑백으로 찍힌 ‘I’m Going Slightly Mad’의 뮤직비디오에서 드러난 프레디의 초췌해진 모습이 팬들을 불안하게 했다. 프레디는 투어를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건강문제를 숨기고 다른 이유로 둘러대었지만, 공식석상에서도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언론에서는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프레디의 모습과 관련해 온갖 루머들을 쏟아낸다. 1991년 11월 23일. 결국 프레디 머큐리는 성명을 통해 자신이 에이즈 환자임을 인정했고 24시간이 지나지 않아 24일 결국 사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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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은 멤버 전원이 차트 1위곡을 작곡한 적이 있는 밴드이다. 다만 프레디의 엄청난 보컬 능력과 카리스마, 그리고 공연에서의 존재감이 워낙 컸기에 프레디 머큐리의 ‘원 맨 밴드’라는 비꼬는 식의 비판도 있었다. 퀸을 본격적으로 정상의 자리에 오르게 한 ‘Killer Queen’과 ‘Bohemian Rhapsody’를 작곡 한 것이 프레디였고, 라이브 에이드에서의 훌륭한 퍼포먼스로 침체에 빠져있던 퀸을 다시 부흥 시킨 것도 프레디였다. 1970년대에 비해 1980년대 앨범들의 퀄리티가 저하되었던 것도 프레디가 유흥에 빠져 곡 작업에 소홀했던 것이 원인 중 하나이고, 그의 사망 이후 사실상 퀸이 멈춰버렸다는 사실도 프레디의 밴드 내 위치를 설명해준다.

퀸은 남미투어를 감행한 최초의 락밴드였고, 86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공연은 서구권 아티스트가 동구권 국가에서 펼친 첫 스태디엄 공연이었다. 자국인 영국을 비롯한 유럽, 남미, 일본 등지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린 밴드였다.

하지만 퀸이 미국에서는 다른 나라에 비해 큰 성공을 거두진 못 했다고 평가 되는데, 앨범 ‘The Game’이 빌보드 1위를 차지한 1980년대 이후 미국 시장에서의 인기가 급락했다. ‘Hot Space’의 실패가 제일 큰 타격이었고 1984년 ’I Want to Break Free’의 뮤비에서 여장을 한 멤버들의 모습에 당시 보수적이었던 미국인들은 등을 돌렸다. 영국에서 1위를 차지하고 퀸의 음악적 방향성을 잘 보여주는 Bohemian Rhapsody와 Under Pressure가 미국에서는 각각 9위와 29위에 그친 것을 보면 기본적으로 퀸의 음악이 미국의 성향과는 맞지 않다고 보는 것도 맞을 것이다. 미국 빌보드 차트에서 1위를 했던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와 ’Another One Bites the Dust’는 기존의 퀸의 스타일과는 매우 동 떨어진 곡으로 평가된다.

1984년 존과 로저가 방한 해 잠실 체육관을 둘러보기도 해서 퀸이 곧 내한 공연을 하는 것으로 팬들은 기대했다. 하지만 결국 콘서트 예정은 없던 일로 되어버렸는데, 가장 큰 이유는 당시 퀸의 대부분의 대표곡들이 한국에서는 방송금지 처분을 받았던 것.. 존과 로저는 자신들의 대표곡이 한국에서 금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다소 충격을 받았다는 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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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행 궤도를 달리고 있는, 퀸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이 영화를 두고 문란한 생활을 하고 결국 에이즈에 걸린 프레디 머큐리를 너무 미화 하는 것 아니냐는 평가도 있지만 관객들로 하여금 퀸의 콘서트를 간접적으로나마 느끼고 즐길 수 있게 해준 것으로 높게 평가된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 라이브 에이드 공연에서의 프레디 머큐리의 모습. 그가 에이즈에 걸려 수척해진 모습과 건강과 목 상태가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몇 십 만 명의 팬들과 같이 호흡하며 멋진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그의 모습이 오버랩 되면서 많은 팬들이 눈물을 흘렸다. 끝까지 천재 아티스트로서의 모습을 잃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던 프레디 머큐리. 그리고 그의 모든 것을 담아냈던 밴드 ‘퀸’. 그들은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로 전설은 아직도 진행 중임을 입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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