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90년대 향수)X(왜곡)=미학=Vapor Wave장르

베이퍼 웨이브 또한 이러한 서브컬처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 모두 한 번쯤은 물을 끓이면 올라오는 수증기를 본 적 있을 것이다. 얼핏 연기처럼 보이는 수증기는 금새 우리의 눈에서 사라지고 말지만 공기 중에 섞여 계속 그 존재를 유지하고 있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문화 또한 공기와 같다. 우리 눈에 선명히 보이는 ‘유행’이라는 문화 속의 몇몇 존재들조차 보이지 않는 더 큰 공간 속에 속해 있을 뿐이다.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것들도 그 안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고, 그것들은 대중에게 가장 가까이 위치해있는 유행을 통해 여과되어 결국은 우리에게 전해진다.

베이퍼 웨이브 또한 이러한 서브컬처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베이퍼(Vapor)라는 단어가 지닌 ‘수증기’라는 의미처럼 이 장르는 한 마디로 명확하게 규정짓기가 모호한 면이 있지만, 전반적인 컨셉이나 창작의 틀을 바탕으로 봤을 때 ‘8, 90년대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소스들을 기반으로 당시의 분위기를 재현, 왜곡하고 편집하는 장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비주얼 아트로서의 베이퍼 웨이브

2012~3년경부터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베이퍼 웨이브는 텀블러(tumblr)의 밈(meme)인 시펑크(seapunk)를 바탕으로 발전하였는데, 이것의 특징은 90년대 풍의 3D CG 아트웍이나 저화질의 영상, 조잡한 폰트, 정체를 알 수 없는 문자들의 마구잡이식 조합이라는 것이다. 촌스러워 보일 수 있는 다양한 소재들을 변형하고 조합하여, 느낌 있어 보이도록 만든 것이다. 특히 베이퍼 웨이브는 와패니즈적인 성향이 강해 일본어가 난무하며 (한국어 또한 이러한 키치적 성향의 일환으로 향유되기도 한다) 일본 버블경제 시절의 다양한 CF나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 등이 자주 차용되기도 한다. 이외에 자주 쓰이는 베이퍼 웨이브의 클리셰는 그리스 신전이나 조각상, 팜트리, 체커보드, window 95, 97, 도트 그래픽, 네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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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으로서의 베이퍼 웨이브

한편 음악 장르로서의 베이퍼 웨이브는 8, 90년대에 유행했던 음악을 샘플링하는 작법을 많이 취하는데, 이러한 점에서 퓨처 펑크(Future funk)와의 장르적 유사성을 지니는 편이다. 또한 미국 매체 시카고 리더는 2013년에 ‘베이퍼 웨이브와 관찰자 효과’라는 기사에서 베이퍼 웨이브를 라운지, 스무스 재즈나 무자크(Muzak)에 영향을 받은 음악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무자크는 상점, 식당, 공항 등에서 배경 음악처럼 내보내는 음악을 뜻하는 단어로 엘리베이터 뮤직과 비슷한 결을 지닌다.

무자크 같은 상업적이고 익숙하며 가벼운 음악을 통해 연출해내는 공허한 분위기가 베이퍼 웨이브 음악의 기본적인 감성이라고 볼 수 있다. 좀 더 깊게 들어가자면 베이퍼 웨이브는 이러한 영혼 없는 음악들을 통해 공허함을 연출함으로써 자본주의, 상업주의에 대한 회의와 무력감을 표현한다고.

(MACINTOSH PLUS – リサフランク420 / 現代のコンピュー)

샘플링이라는 퓨처 펑크적인 방법론에서 벗어나 vapor-trap이라는 새로운 파생 장르를 탄생시킨 BLΛNK BΛNSΗΣΣ의 앨범도 한 번쯤은 돌려보시라.

최근의 베이퍼웨이브

음악과 비주얼 아트라는 서로 다른 분야에서 동시에 발전해온 베이퍼 웨이브라는 문화는 그 둘이 결합할 수 있는 뮤직비디오라는 콘텐츠에서 큰 시너지를 발휘해왔는데, 이러한 시도는 2010년대 중반 이후 힙합신뿐만 아니라 한국 대중음악계에까지 유입되어왔고 현재도 이러한 흐름은 유지되고 있다.

혹자는 베이퍼 웨이브가 한때 반짝 유행했던 단순한 키치적 향유에 불과하다고 평가한다. 물론 베이퍼 웨이브라는 장르의 창작 기법이 지닌 방법론적인 한계 역시 존재한다. 샘플링과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온갖 이미지들의 짜깁기. 태생적으로 과거에 대한 향수라는 감성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따라올 수밖에 없는 꼬리표인 셈이다.

그러나 베이퍼 웨이브는 2017년을 지나 2018년 현재에도 잠깐 뜨고 마는 밈이 아닌 지속적인 차용과 재생산이 가능한 소재, 문화예술 사조로서 자리 잡아가고 있으며 (위에 언급한 기리보이의 M/V는 17년 12월에 릴리즈되었다), 따라서 독립적인 장르로 보기보다는 미학적, 정서적 경향의 일종으로 보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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