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분히 섹시했던 나, 너 그리고 詩

누나를 기다리면서 무얼 하면 좋을까요. 떨어지라면 떨어질게 바닥에 물이 되라 하면 할게요.


11월이다. 많은 이들이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계절’이라고 표현하는 11월이다. 옷깃을 여미면 여밀수록 내면이 헛헛해지는 계절이다.

이렇게 바람이 불 때면 어릴 적 읽은, 바람과 해의 내기를 다룬 동화를 기억한다. 내기의 주제는 지나가는 사내의 망토를 벗기는 것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처음 도전장을 내민 것은 바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내의 망토를 벗기고자 아무리 힘을 써도 성공하지 못했다. 사내는 옷자락이 날아가지 않게 하려고 외투를 더 꼭 쥐고 한없이 자신의 몸체로 파고들 뿐이었다.

결국 내기에서 이긴 것은 해였다. 해는 조용히, 그만의 방식으로 사내를 비추고, 옷을 벗게 하고,, 물속으로 첨벙 뛰어들게 하는 활력까지 주었다.

 

 

그딴 남자 만나요 물어볼게요 누나, 누나 말예요 정말 이뻐요 우리 가게에 놀러 와요
주방에 조용히 있을거야 만주집을 지나고 샤이닝 술집을 끼고 돌면 내가 누나를 기다리면서 무얼 하면 좋을까요
떨어지라면 떨어질게 바닥에 물이 되라 하면 할게요.

 

 

-주하림, ‘남학생’, <비벌리힐스의 포르노 배우와 유령들>, 창작과 비평, 2013

 

 

각자의 해가 필요한 계절이다. 사랑에 빠져 서로의 해가 되고, 쏟아지는 따뜻한 기운에 겨울이 온 지도 모르고, 옷을 벗고, 어디든 첨벙첨벙 노다닐 수 있는 용기를 갖고 싶은 계절이다. ‘떨어지라면 떨어지고, 바닥에 물이 되라면’ 그렇게 할 만큼 나를 뜨겁게 만들어 줄 무언가가 그리운 계절이다.

 

코끝에 바람이 닿을 때, 우리가 떠올리는 기억들


외로움보다
가파른 절벽은 없지

살다 보면 엉망으로 취해 아무 어깨나 기대

소리 내서 울고 싶은 그런 저녁이 있다.

 

-김수영,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 창작과 비평, 1996

 


바람의 밀도를 가늠할 수 없는 싱숭생숭한 온도를 어찌할 바 모르겠는 저녁, 지나간 옛 연인을 떠올린 적이 있을 것이다.

 

 

기억나, 오빠? 술만 마시면 라이터 불로 거웃을 태워 먹었던 ?
정말로 개새끼였어, 오빤, 그래도 우린 짬만 나면 엉기곤 했지, 풀린 투견처럼, 급소로 급소를 물고 늘어지곤 했었지,
사랑은 지옥에서 개라니, 뭐니, 헛소리를 해대면서

 

 

-김언희, ‘보고 싶은 오빠’ , <보고 싶은 오빠>, 창작과 비평, 2016

 

 

기억은 미화된다고 한다. 그러나 기억을 ‘추억’이라는 뉘앙스로 남기기 위하여 애쓸 필요 있을까.
담담하게 옛날의 사랑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센치한 시선이 이 초겨울을 더 초겨울답게 만들어줄지도 모르겠다.


섹시했던 어떤 날들의 우리

우리는 우리가 지나왔던 수많은 정원에 아무렇게나 꽂혀 있고

지나쳤던 입술들에게 나는 무엇으로 불리고 있을까

 

-주하림, ‘빠리의 모든 침대가 나의 고향’ ,
<비벌리힐스의 포르노 배우와 유령들>, 창작과 비평, 2013

 

 

그래서 그냥 질문을 던지고는 하는 것이다. 누군가와 새로 만든 텃밭이 사랑이라는 양분으로 어디까지 자라날 수 있었는지, 마음껏 사랑했던 그때의 내 모습이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지 말이다.

 

피어싱을 커플들이 모텔에서 지르는 교성처럼

빨갛게 익은 십자가와 달이 솟아오른다

소녀들은 재빠르게 익어간다, 우리가 사랑을 믿을

사랑은 우리의 화학적 성분을 변화시킨다

비타민과 집착, 철분과 냄새

 

-최금진, ‘사랑의 감옥’, <사랑도 없이 개미귀신>, 창작과 비평, 2014

 

 

그러나 이미 끝나버린 관계들에 답이 있을까. 지난 사랑에 많은 질문을 던져봤음에도 새로운 시작점에 마주할 때 우리는 늘 초보자가 된다. 사랑이라는 것의 물성이 그렇다. 시에 나타난 표현처럼 ‘우리가 사랑을 믿을 때’면, 추운 날도 상대방에게 옷을 벗어주게 되고 그런 나날의 중심에서 보낸 어떤 밤은 평생 기억하게 된다.

 

 

 

우리는 당황했지만 즐거웠고 우리는 은밀했다

이상했지만 세계는 완벽했고 중력은 충분히 희박했다

검색창 밖으론 하루종일 푹푹 분홍눈이 내렸고

 하루종일 우주선처럼 둥둥 떠다녔다

사랑과 합체한 사랑은, 그리고 우리는

그후하나는 많고 둘은 부족한별의 거북무덤엔 다음처럼 기록되었다

 사랑을 체험한 뒤에는 전과 똑같은 인간일 없다!

 

-안현미, ‘합체 <이별의 재구성>, 창작과 비평, 2009

 

 

겹겹이 입을 옷보다는 궁극적으로 옷을 벗게 만드는 해가 필요한 계절, 나는 한때 내 곁에 있었던 ‘해’ 그리고 ‘우리’를 회고한다. 계절의 구분 없이 우리를 뜨겁게 만드는 것이 있었음을 믿는다.

뜨거울 수 있었기에 식을 수도 있었고, 그토록 섹시했기에 가끔은 이렇게 센치할 수도 있음을.

 


0 Comments

댓글 남기기

You may also like